훈화

[스크랩] 마리아와 성령, 그 사랑의 일치

비안김 2008. 5. 28. 00:07

  어머니 마리아와 성령, 그 사랑의 일치


  그리스도교는 종교학적으로 계시종교이며 타력종교이며 계약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의 핵심에 계약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계약이지요.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구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류가 맺어진 계약이 신약이지요. 구약이 법과 약속으로 이루어진 계약이라면 신약은 바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계약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랑이 계약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계약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헌신이며 투신이고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약이라는 말보다는 신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사랑의 신비의 중심에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십니다. 저는 이 글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성령과 어떤 관계인지,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어머니 마리아와 성령과의 관계


  어머니 마리아는 바로 사랑의 계약, 신비의 눈에 보이는 표지입니다. 바로 마리아를 통해서 새로운 사랑의 계약, 신약의 시작이 되는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마리아와 성령의 관계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와 성령이 맺는 관계도 사랑의 계약, 신비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바로 성령의 배필이시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리아를 우리 신앙의 어머니요, 모범으로 따르며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성령과 그의 배필이신 마리아가 이루는 일치를 이해하고 그리스도가 바로 이 사랑의 일치로부터 인간이 되시어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신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내용입니까?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잉태되어 나시고” 이지요.

  이 대목이 너무나 신앙의 핵심이고 신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기도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지요. 사실 예전에는 사제가 미사 중에 이 구절을 기도하면서 제대를 향해 무릎을 꿇었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미사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드리면서도 이 내용이 단순하지만 얼마나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깊고 심오한 신비인지를 헤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강생의 신비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이 대목의 내용을 우리가 제대로 깊이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바치게 되는 부분입니다. 이 신비의 중심에 성령과 어머니 마리아의 깊은 일치가 있습니다. 이 일치는 강생의 신비를 위해 2000년 전에 일회적으로 단 한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이 신비를 드러내는 성서 구절이 어느 대목입니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공동번역에서 ‘감싸 주실 것이다’고 옮긴 부분을 새 성경이 ‘덮는다’고 옮겼는데 원문은 깊이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일치가 강생의 신비 때에 단 한번 이루어지고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라면 마리아는 다만 역사 속의 한 인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이 마리아를 단 한 번 감싸 주시거나 그 힘이 덮어서 일치를 이루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속적인 강생의 신비를 통해서 매 순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강생의 신비에서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며칠 전 평화방송에서 성 비오 신부님에 관한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담당 주교가 비오 신부님을 박해를 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자, 비오 신부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바르게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교회가 저를 박해하지 않았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비오 신부님을 박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비오 신부님을 구원하지 않으셨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저에게 교회가 행한 몰이해의 박해까지도 섭리로 받아드리며 구원의 도구로 이해하는 신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강생의 신비는 구원의 시작이며 이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 생명이 영적으로 태어날 때마다 이 신비가 다시 재현되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강생의 신비를 통해 영적으로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 구약을 새롭게 신약으로 바꾸시며 마리아를 당신 백성의 표상으로 세우십니다. 호세아가 예언한 말은 바로 이제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의 밀어가 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 21-22)


  우리는 이제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을 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새로운 계약, 사랑의 신비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택하신 분, 하느님과 우리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교황  성 레오는 그의 강론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교 백성의 기원이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교회 신비체의 머리인데 머리의 탄생은 몸의 탄생도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셨듯이 우리도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교황 성 비오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이 반포한 회칙, [저 하느님께]를 통해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살과 피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한 태중에서 당신을 믿을 사람들로 이루어질 영적 몸과 결합되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예수님을 품으면서 동시에 구세주의 생명으로 유지할 사람들까지도 품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분의 살과 피의 일부분이 되었으니까 본래 동정녀 마리아의 품속에 있었던 우리는 거기서 몸의 머리가 태어날 때 머리에 딸려서 같이 태어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영적 신비의 의미로 보아 마리아의 자녀라고 불리고 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모두의 참된 어머니가 된다.


  교황 비오께서는 우리가 이 신비를 모른다면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온전히 감상적이며 불완전한 신심이라고 합니다. 그런 신심은 뿌리가 잘린 온실의 꽃이지, 땅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모성, 마리아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강생의 신비 자체에서 시작되고 이 점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비의 초점입니다.

  마리아가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이고, 마리아는 어머니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원한 생명을 전달해 주십니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을 낳으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 자신을 봉헌하며 어머니로써 충실하셨듯이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할 때부터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갈 때까지 우리를 품어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성 요한 비안네 신부는 “어머니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에 비한다면 얼음조각에 불과할 것입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어머니 사랑의 바탕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마리아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마리아가 계시지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일 뿐입니다. 이제 성령을 살펴 볼 차례입니다.


  2. 성령,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는 분


  우리가 새로운 계약, 성령과 마리아가 이루는 사랑의 신비를 이해한다면, 이 두 분의 역할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깊이 일치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고 깊이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시려고 성자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 12-13)


  이렇게 복음서는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님의 최후만찬 후 제자들에게 행하신 긴 고별사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우리를 말씀의 지혜로 이끌어주어 영적인 눈을 뜨고 귀를 듣게 하여 모든 진리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신 후에 보내 주시는 당신의 영이시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지만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고 그 구원의 유산을 보존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과 사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 특별한 계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지상에서의 활동과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것으로 끝났고,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상속으로 물려주신 그 유산을 보존하는 사명만 하면 됩니다.

  어떤 특별한 사적 계시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지요. 성령 쇄신 운동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주시지 않은 어떤 특별한 다른 계시나 유산을 주시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계시가 없다는 것을 잘 설명한 사람은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그는 [갈멜의 산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당신 아드님- 즉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인 당신 말씀- 을 주심으로써 일체를 우리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단 한 번에 오직 이 말씀으로 말씀하셨으니, 다시 더 말씀하실 것을 지니지 않으신 까닭이다.

  바오로 성인께서 히브리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한 예전 식으로 하느님과 사귀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 눈길을 모으라고 하심도 이 뜻이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 1, 1-2)

  이 말씀으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는 하느님은 말없이 계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이니 옛날에는 예언자들에게 부분적으로 하시던 것을 이제는 당신 아드님이신 ‘전부’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에 이르러 아직도 하느님께 문의하다든지, 어떤 시현이나 계시를 받고 싶어 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바보짓을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욕되게 하리니, 그리스도 하나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 신기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만 눈을 돌리고 그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성령께로 가야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있게 만드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하나로 일치하는지 사도 바오로는 때로 이 두 분을 서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과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이고 같은 사실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로마 8, 8-11)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활동이 성령의 활동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 영혼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성령의 구체적인 활동의 표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가야 합니다.


  3.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온전히 당신 아드님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서 아드님 예수님께로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갖는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신심은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께 대한 신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의 시선이 당신에게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셨듯이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기를 바라신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어머니 마리아께서 여러 번 여러 장소에서 발현하셨고 여러 가지 메시지를 주셨지만 다른 특별한 계시를 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이끄시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20) 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삶은 아예 없었고, 언제나 아드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사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드님 사이에 깊은 영적인 일치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에 대해 신학자 뇌벨 (Neubert)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당신 인성을 드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신성에 언제나 더 참여하게 해 주셨다. 마리아의 몸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사랑을 당신 사랑과 닮게 하시고, 그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셨다. 마리아의 피는 예수님의 몸 안에서 돌고 예수님의 은총은 마리아의 영혼 안에서 돌고 있었다. 성모님은 성자를 당신 생명으로 살게 하셨지만 성자께서는 그 모친을 당신 생명으로 살게 하셨다.”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또 하나의 다른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모성으로 우리의 어머니로써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서로 이루는 사랑의 일치이며 이 사랑에 이르는 통로가 되시는 분이 바로 이 사랑의 일치에 가장 깊이 머무르시는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이 사랑의 일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 단테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대여, 그리스도와 똑같이 닮은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 밝은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를 우러러 뵈올 수 있는 힘이

  그대에게 생긴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어머니 마리아는 정작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도록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신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봄으로써 마리아에게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진정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만을 믿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마리아에 대한 공경 때문에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흠숭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은 말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임무는 우리를 안전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는 우리를 영원하신 천주 성부께로 확실하게 이끌어 주는 데에 있다.”

  또한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성인이 되고, 완전하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는데 마리아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길은 없다. 세상에서 성모님만큼 예수님을 아는 이는 없었고, 그분만큼 예수님을 누구에게라도 잘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나 스승은 없다.”

  우리가 어머니 마리아와 일치를 이루면, 어머니는 우리가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 아니 온 세상에게 당신 아드님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진정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중재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중재자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는 중재자이시기도 합니다. 올라가는 중개는 마리아는 성령을 알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역할이며, 내려오는 중개는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개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마리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신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어머니 마리아가 올라가는 중재가가 되시는가? 답은 바로 당신이 드린 응답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이 응답은 성령께 드리는 완전한 동의,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이루시려 하는 일에 대한 온전한 투신, 내어맡김, 순명입니다. 마리아의 이 온전한 ‘예’는 물론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온전한 자유 의지로 행한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신 분이십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감싸 주신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결단은 언제나 우리의 몫이듯이 마리아의 응답도 온전히 자유로이 택하신 결단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응답 안에서 깊은 신비를 봅니다. 이 응답은 단순히 한 개인이 드린 응답이 아니라 바로 온 인류를 대표해서 드린 응답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습니다.

  “마리아께서 아멘 하시면 동시에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갈 모든 아멘이 메아리친다. 우리도 당신 안에 끌어넣어 당신과 함께 바치신다. 이 얼마나 엄청난 행복인가!”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바로 당신의 응답을 통해 우리의 응답을 모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은총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의 원의와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 드리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신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우리의 원의나 기도가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으며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 없이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리아는 우리가 성령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루도비꼬 성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리아는 닫혀 있는 샘이며 성령의 충실한 배필이므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성령뿐이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따로 만든 세계가 있는데 이를 마리아라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낙원이며 기막힌 세계이다. 여기에 성자께서 들어가 기묘한 일을 하시고, 바라다보시며 만족해하신다.”

  루도비꼬 성인은 사실 ‘마리아는 닫혀 있는 샘’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있는,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루도비꼬 성인의 이 말이 역으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마리아를 알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마리아 없이 성령을 알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우리를 성령께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고 길이 되시며 통로가 되십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말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이 성령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성령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우리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중개를 보기로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강생에서 시작된 구원의 신비가 마리아를 통해서 계속 우리 안에 이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 안에 머무시기 위해서 어머니로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특별한 모성을 지니고 계시고 그 모성은 바로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날 때, 성령과 함께 마리아 안에서 태어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 은총 전체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 안에서 당신과 직접 만나게 하시려고 택하신 방법이 바로 우리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통한 우리의 봉헌이 하느님께 올라가듯이 하느님의 은총도 마리아를 통해서 마치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내리는 것입니다.

출처 : 홍천 영혼의 쉼터
글쓴이 : 류해욱 원글보기
메모 :